모두가 무너질 때, 누군가는 기회를 잡는다
여러분은 경제 위기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일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1929년 대공황은 미국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은행 앞에 줄을 선 사람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기다리는 가족들, 일자리를 찾아 먼지 쌓인 길을 떠도는 이주민들. 실업률은 치솟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 자체가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운이 좋았을까요? 아니면 위기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대공황 시기에 부를 만들거나 지킨 5명의 인물을 통해, 경제 위기 속에서도 작동하는 부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하워드 휴즈: 유산을 미래 산업으로 전환한 전략가
항공우주 산업의 선구자이자 영화 제작자로 유명한 하워드 휴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에비에이터>를 보신 분이라면 그의 독특한 캐릭터를 기억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괴짜 억만장자였을까요?
휴즈는 1923년, 겨우 18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원유 공구 사업과 함께 거의 100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당시 많은 부유한 청년들이 그랬듯이, 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고 비행기를 조종하며 화려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휴즈가 남다른 점은 단순히 돈을 쓰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엔지니어로서의 재능과 기업가 정신으로 자신의 열정을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전환했습니다. 1930년대 초,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생계를 걱정할 때, 휴즈는 아버지의 공구 회사에 새로운 사업 부문인 ‘휴즈 항공기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 회사는 1940년대 주요 방위 산업 하청업체로 성장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습니다. 휴즈는 대공황 기간 동안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조종할 비행기를 만들면서 각종 속도 기록을 경신했고, 이는 그의 사업에 대한 최고의 마케팅이 되었습니다.
휴즈는 상속받은 자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산업(항공우주)에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성장 가능성 있는 분야를 찾아 장기적 관점으로 자본을 투입한 것입니다.
J. 폴 게티: 공황 속에서 싸게 사들인 원유 재벌
원유 회사를 거의 공짜로 살 수 있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1932년 J. 폴 게티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이 문장만큼 그의 투자 철학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요?
게티는 이미 원유 사업가로서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 그의 아버지 조지 게티는 오클라호마의 유전을 매입하여 부를 축적했고, 게티는 가업에 합류하여 사업 수완을 키웠습니다. 1930년 아버지로부터 5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6억 원)를 물려받았지만, 이는 그가 훗날 쌓을 재산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대공황 시기, 게티는 남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자산을 헐값에 내놓을 때 냉정하게 매수했습니다. 그는 수백만 달러를 투입하여 석유 관련 주식과 심지어 부채를 진 기업까지 저가에 인수했습니다. 1930년대 퍼시픽 웨스턴 오일 코퍼레이션을 인수하며 끈기 있게 주식을 사들인 그는, 대공황이 끝날 무렵 원유 재벌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게티가 투자에는 과감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극도로 인색했다는 것입니다. 손자가 납치되어 몸값 1,600만 달러를 요구받았을 때도, 그는 “나에게는 손주가 14명 더 있는데, 지금 1페니만 지불하면 손주가 14명이나 납치되는 셈”이라며 협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게티는 ‘남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스러워라’는 투자 원칙을 완벽히 실천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자산 가치가 폭락할 때 냉철하게 저가 매수에 나선 것이죠. 현금 보유의 중요성과 역발상 투자의 힘을 보여줍니다.
메이 웨스트: 가난에서 스타덤으로, 엔터테인먼트의 힘
모든 부자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메이 웨스트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대공황 시절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연봉을 받는 스타가 된 인물입니다.
재즈 시대의 ‘잇 걸’이었던 웨스트는 풍만한 몸매와 도발적인 유머로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평생 보드빌 무대에서 활동하며 실력을 갈고닦았고, 직접 희곡을 쓰고 주연을 맡으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926년 브로드웨이에 올린 그녀의 매혹적인 희곡은 비평가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관객들은 열광했습니다. 375회 공연 후 음란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 수감되었지만, 이조차 그녀에게는 최고의 홍보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조차 그녀는 언론을 위해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했죠.
1932년 영화계로 진출한 웨스트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계약하며 연봉 30만 달러 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는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연봉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대사를 직접 쓸 수 있는 권한까지 얻었고, “언젠가 와서 나를 만나봐(Come up and see me sometime)” 같은 유명한 대사들을 탄생시켰습니다.
헤이스 코드로 인한 검열의 압박 속에서도, 그녀가 연기한 재치 있고 섹시한 캐릭터들은 대공황 시대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경제 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즐거움과 위안을 찾았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불황에도 강한 회복력을 보입니다. 웨스트는 자신만의 독특한 브랜드를 구축하고, 논란조차 마케팅 기회로 활용한 전략가였습니다.
진 오트리: 평범한 전신 교환수에서 ‘노래하는 카우보이’로
진 오트리의 이야기는 평범한 배경에서 시작된 가장 미국적인 성공 스토리입니다. 그는 오클라호마의 목장에서 자라 아버지를 도우며 일했고, 나중에는 전신 교환수로 근무했습니다.
오트리는 일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1920년대 후반 이것이 기회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다양한 공연을 하며 아메리칸 레코드 코퍼레이션(후에 컬럼비아 레코드)과 계약을 맺었고, 1934년 시카고의 라디오 쇼 “내셔널 반 댄스”에서 “노래하는 카우보이”로 출연하며 전국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노래와 코믹한 스타일은 곧 할리우드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대공황 시절 오트리는 “인 올드 산타페”를 시작으로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전신기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입을 올렸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혁신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카우보이를 “촌뜨기”가 아닌 매력적이고 멋진 서부의 영웅으로 대중화시켰고, 이는 엄청난 인기로 이어졌습니다.
오트리는 대공황이 끝난 후에도 투자를 다각화했습니다. 1939년에는 오클라호마주 버윈에 자신의 순회 로데오를 위한 영구적인 본거지를 마련했는데, 이는 먼지 폭풍으로 황폐해진 마을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마을 이름을 ‘진 오트리’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평범한 배경이 성공의 장애물은 아닙니다. 오트리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꾸준히 갈고닦으며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또한 성공 후 다각화된 투자와 지역사회 기여를 통해 지속 가능한 부를 구축했습니다.
존 딜린저: 역설적 영웅, 은행 강도의 두 얼굴
마지막 인물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존 딜린저는 범죄자였지만, 대공황 시기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독특한 케이스입니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딜린저는 어린 시절부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며 감옥을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초, 그는 진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딜린저와 그의 갱단은 베이비 페이스 넬슨, 해리 “피트” 피어폰트 같은 악명 높은 범죄자들과 함께 군사 전술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은행을 털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그들은 12곳의 은행에서 3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70억 원)를 훔쳤습니다.
하지만 딜린저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은행을 턴 것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은행 강도 사건 중에 수천 건의 주택 담보 대출 기록을 훔쳐 파기했고, 이를 통해 수천 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빚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대공황 시기 은행은 사람들의 집과 농장을 무자비하게 압류했고, 이는 엄청난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딜린저는 마치 현대판 로빈 후드처럼 은행에서 돈을 훔치고 사람들의 빚을 없애주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영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사례는 합법적인 부의 축적 방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위기 시기에 대중의 분노가 어떻게 방향을 잡는지,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어떻게 ‘반영웅’을 탄생시키는지 보여줍니다. 경제 위기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위기 속 부의 원리, 지금도 유효한가?
대공황 시기 부를 축적한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 첫째,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입니다. 게티는 남들이 공황에 빠졌을 때 냉정하게 저가 매수를 단행했고, 휴즈는 미래 산업에 투자했습니다.
- 둘째,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구축하라. 메이 웨스트와 진 오트리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 셋째, 현금 흐름과 유동성의 중요성. 위기 시기에 현금을 보유한 자가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 넷째, 다각화와 장기적 관점. 성공한 이들은 한 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다양한 투자처를 개척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혹시 위기만 보이시나요, 아니면 그 속에 숨겨진 기회도 함께 보이시나요? 역사는 반복되지는 않지만 비슷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대공황 시기 부를 만든 이들의 전략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참고 자료: Money Digest, “The Richest People During The Great Depre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