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씽킹은 단계가 아닌 인식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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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혹시 디자인 씽킹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나요? 포스트잇을 벽에 붙이고, 공감 지도를 그리고, 브레인스토밍을 하면서 “이제 나도 디자이너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느꼈던 순간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으로 돌아오면 어떤가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똑같은 패턴으로 해결책을 찾고 있지 않나요?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 씽킹을 배우지만, 정작 생각이 바뀌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배웠지만, ‘어떻게 보는가’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디자인 씽킹을 배워도 생각은 그대로일까?

절차를 외웠지만, 사고는 바뀌지 않았다

대부분의 디자인 씽킹 교육은 친절합니다. 공감(Empathy), 문제 정의(Define), 아이데이션(Ideate), 프로토타입(Prototype), 테스트(Test). 이 다섯 단계만 따라가면 누구나 창의적 문제 해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상상해보세요. 한 스타트업의 제품 매니저인 민수 씨가 있습니다. 그는 3일간의 집중 디자인 씽킹 워크숍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머릿속엔 5단계 프로세스가 또렷합니다. 하지만 실제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우리는 공감 단계인가, 아이데이션 단계인가?

팀원들은 혼란스러워하고, 민수 씨는 매뉴얼을 다시 펼쳐봅니다. 결국 워크숍에서 배운 것들은 회의실 한구석에 쌓인 포스트잇처럼 잊혀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교육심리학자 존 앤더슨(John Anderson)은 이를 ‘절차적 학습’의 한계라고 설명합니다. 절차적 학습은 특정 과업을 빠르게 수행하게 하지만, 새로운 맥락으로 전이되지 않습니다. 즉, 여러분이 배운 것은 ‘디자인 씽킹 도구’일 뿐, ‘디자이너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던 겁니다.

현장의 문제는 선형적이지 않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 디자인 문제는 단계별로 풀리지 않습니다. 디자인 연구자 리처드 뷰캐넌(Richard Buchanan)은 이를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라고 불렀습니다. 경계가 모호하고, 문제와 해답이 동시에 진화하는 복잡한 상황 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병원에서 환자 대기 시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단순히 “대기 시간을 줄이자”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관찰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달랐습니다. 환자들이 불안해하는 진짜 이유는 시간이 아니라 ‘불확실성’이었습니다. 언제 호출될지 모르는 상황이 스트레스였던 거죠. 문제 정의가 바뀌자 해결책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기 시간을 줄이는 대신, 실시간 알림 시스템과 예상 대기 시간 안내를 도입했습니다.

이처럼 현실의 디자인은 관찰하면서 동시에 형태를 떠올리고, 프로토타입을 만들며 다시 문제를 재정의하는 비선형적 과정입니다. 단계를 따르는 사고로는 이 리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디자인 씽킹은 ‘보는 법’을 바꾸는 훈련이다

전문가는 절차가 아닌 패턴을 본다

인지심리학자 게리 클라인(Gary Klein)의 연구는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그는 소방관, 파일럿, 외과의사 같은 전문가들을 수년간 관찰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여러 대안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상황 속 단서를 빠르게 인식하고, 패턴을 감지했습니다. 이를 RPD(Recognition-Primed Decision) 모델이라 부릅니다.

베테랑 소방관을 생각해보세요. 불타는 건물에 들어선 순간, 그는 연기의 색깔, 불꽃의 움직임, 벽의 균열을 동시에 읽어냅니다. “이건 전에 봤던 유형”이라는 직관이 즉시 작동하고, 머릿속에서 상황을 시뮬레이션한 뒤 바로 행동합니다. 매뉴얼을 참조할 시간은 없습니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분석하기보다 패턴을 인식합니다. 사용자의 표정, 공간의 흐름, 말하지 않은 불편함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맥락으로 읽힙니다. 이것이 바로 전문성의 본질입니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디자인은 사고를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다

도널드 쇤(Donald Schön)은 디자이너를 “행위 속에서 반성하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디자이너는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봅니다. 이를 “행위 속 반성(Reflection-in-Action)”이라 합니다.

건축가가 스케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연필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순간, 그는 그린 선을 ‘다시 봅니다’. 그 선이 예상치 못한 형태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새로운 생각을 촉발합니다. 손의 움직임과 눈의 관찰, 그리고 뇌의 사고가 하나의 리듬으로 작동하는 겁니다. 스케치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생각을 실험하는 장치입니다.

프로토타입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프로토타입을 ‘시제품’으로 생각하지만, 디자인 관점에서 그것은 사고의 시뮬레이터입니다. 아이디어를 실제 형태로 옮기면, 우리는 그것을 만지고, 사용하고,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프로토타입은 세계와 대화하기 위한 언어인 셈이죠.

인식의 리듬을 체화하는 실천법

1. 관찰하되, 해석의 틀을 먼저 의심하라

디자인 리서치는 데이터 수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려 하는가’를 재정의하는 일입니다. 디자인 이론가 키스 도스트(Kees Dorst)는 이를 “프레임 전환”이라 불렀습니다.

사용자를 관찰할 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가 아니라 “내가 이 행동을 ‘문제’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먼저 질문하세요. 여러분의 시선이 이미 특정한 해석의 틀에 갇혀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현상도 다른 렌즈로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드러납니다.

실제로 한 카페 체인이 고객 회전율을 높이려 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너무 오래 앉아있다”를 문제로 봤죠. 하지만 프레임을 바꿔 “사람들이 왜 오래 머물고 싶어 할까?”를 물었을 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보였습니다. 코워킹 스페이스와의 결합이었습니다.

2. 생각하기 전에 먼저 형태로 만들어라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머릿속에만 두지 마세요. 손으로 그리고, 종이로 접고, 레고로 만들고, 역할극으로 연기하세요. 형태화는 생각을 고정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장치입니다.

“완벽한 아이디어”를 기다리지 마세요. 대신 30분 안에 만들 수 있는 러프한 프로토타입부터 시작하세요. 종이와 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완성도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느냐입니다.

한 스타트업 팀은 새로운 앱 기능을 구현하기 전, 종이로 화면을 그리고 포스트잇으로 버튼을 만들어 사용자 테스트를 했습니다. 코드 한 줄 작성하기 전에 핵심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절약된 개발 시간만 2주였습니다.

3. 피드백을 평가가 아닌 대화로 받아들여라

많은 사람이 피드백을 두려워합니다. 평가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디자인에서 피드백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이 발생하는 순환입니다.

피드백을 받을 때 “이 반응은 내가 놓친 어떤 맥락을 알려주는가?”를 질문하세요. 부정적으로 보이는 반응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선물입니다. 사용자가 “이거 별로네요”라고 말했다면, “어떤 점이 기대와 달랐나요?”를 물으세요. 그 간극에 진짜 통찰이 숨어있습니다.

4. 리듬을 익히는 반복 훈련을 하라

디자인 씽킹의 전문성은 관찰-형태화-피드백이 하나의 리듬으로 작동하는 상태입니다. 이 리듬은 책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매일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하세요. “출근길에 본 불편한 점을 스케치로 개선안 그리기”, “오늘 읽은 기사를 3분 안에 다이어그램으로 요약하기” 같은 것들입니다. 중요한 건 결과물의 퀄리티가 아니라, 관찰 → 형태화 → 반성의 순환을 빠르게 돌리는 연습입니다.

한 디자이너는 100일 동안 매일 하나씩 일상의 불편을 해결하는 미니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50일쯤 지나자 문제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리듬이 몸에 배기 시작한 거죠.

5. 세계를 대상이 아닌 대화 상대로 대하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태도 전환입니다. 디자인은 세상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돕는 일입니다. 디자이너는 문제를 정복하는 영웅이 아니라, 드러남을 함께 만드는 동반자입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내가 해결할 문제는 무엇인가?” 대신 “이 상황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를 질문하세요. 이 작은 전환이 여러분의 시선을 통제에서 경청으로, 분석에서 공감으로 바꿔줍니다.

디자인 씽킹은 삶의 방식이다

여러분, 디자인 씽킹은 도구 상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공감 → 정의 → 아이데이션의 단계를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현상 속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구조를 감지하는 감각을 기르는 것입니다.

전문가와 초보자의 차이는 지식의 양이 아닙니다. 보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전문가는 패턴을 인식하고, 생각을 형태로 실험하며, 피드백을 통해 사고를 확장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리듬으로 진동할 때, 디자인 씽킹은 기술이 아닌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제 포스트잇을 내려놓으세요. 대신 여러분의 일상에서 작은 실험을 시작하세요. 관찰하고, 그리고, 다시 보세요. 그 반복 속에서 여러분의 인식은 조금씩 재구성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디자인 씽킹은 워크숍 자료가 아닌, 여러분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사고의 리듬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고 계신가요? 오늘 하루 동안 마주친 불편함 하나를 스케치로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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