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난 9월, 앤트로픽이 공개한 발표는 AI 활용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동안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 부르며 집중했던 ‘질문을 잘 쓰는 기술’은 이제 더 큰 그림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진짜 게임 체인저는 컨텍스트, 즉 정보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AI에게 “전쟁 직후 폐허에서 살아남은 소녀의 독백을 쓰라”고 요청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결과물이 나오긴 하겠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피상적입니다. 하지만 “냉전의 여파가 남은 2060년, 인간과 AI가 함께 살지만 서로를 불신하는 시대”라는 세계관을 먼저 설정한다면 어떨까요? AI는 단순히 문장을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처럼 이야기를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프롬프트는 질문, 컨텍스트는 세계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AI의 역할과 규칙을 정의하는 기법이라면, 컨텍스트 엔지니어링은 시스템 설명서, 도구, 외부 자료, 대화 기록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더 넓은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프롬프트가 질문이라면 컨텍스트는 그 질문이 존재하는 세계 그 자체입니다.
왜 이런 구분이 중요할까요? AI는 아직 기억이나 감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번 대화할 때마다 “지금 어떤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친구와 대화할 때는 공유된 경험과 맥락이 자동으로 깔려 있지만, AI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관을 먼저 구축하고, 그 안에서 질문을 던지는 이중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차이가 아닙니다. 창작의 철학이 바뀌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AI에게 답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살아갈 세계를 설계하는 창조자가 됩니다.
컨텍스트가 중요한 세 가지 이유
첫째, 트랜스포머 구조의 한계입니다.
트랜스포머는 문장의 모든 단어(토큰)가 서로를 주의 깊게 살피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문제는 문장이 길어질수록 연결 관계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고, AI의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를 ‘컨텍스트 rot(문맥 부패)’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우리가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들으면 정작 중요한 내용을 놓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건 ‘Lost in the Middle(가운데서 길을 잃는 문제)’라는 현상입니다. 중요한 정보가 문장 중간쯤에 있을 때, AI는 그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사람이 긴 글을 읽을 때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은 기억하지만 중간 부분을 흘려듣는 것과 비슷합니다. 쓸모없는 단어가 많으면 계산 비용과 속도 지연이 커지고, 잘못된 답이 나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둘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역할이 재정의됩니다.
단순히 질문만 잘 설계하는 역할은 줄어듭니다. 문장을 예쁘게 다듬는 미시적 기술보다는, 문맥과 도구, 기억, 검색 흐름 전체를 설계하는 거시적 운영 능력이 더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간결하고 명확한 프롬프트는 여전히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AI 에이전트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떻게 정보를 요약할지 안내하는 운영 매뉴얼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효율성과 품질의 균형입니다.
컨텍스트가 너무 길면 연산 비용이 증가하고 응답 속도가 느려집니다. 반대로 너무 짧으면 AI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답을 내놓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정보만 정확하게 제공하는 전략적 설계가 필수적입니다. 이것은 마치 건축에서 불필요한 기둥은 제거하되 구조적 안정성은 유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 세계를 짓는 세 단계
컨텍스트 스토리텔링은 세 개의 층위로 구성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실제로 AI에게 세계를 이해시키는 건축 과정입니다.
- 1단계: Semantic Context Design(의미 문맥 설계)
- 언어, 시대, 가치관, 감정선 같은 세계의 의미 규칙을 정합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미국 재즈 바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설정한다면, AI는 그 시대의 언어 스타일, 사회적 분위기, 음악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반영해야 합니다. “당신은 금주법 시대의 스피크이지(비밀 술집)를 운영하는 주인입니다”라는 설정만으로도, 대화의 톤, 사용하는 단어, 긴장감의 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 2단계: Interaction Context Design(상호작용 문맥 설계)
- 목표, 제약, 관계의 긴장 같은 인물들 사이의 상호작용 규칙을 만듭니다. “주인공은 경찰과 갱스터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하지만, 두 세력 모두 그를 의심합니다”라는 관계망을 설정하면, AI는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양쪽의 압박, 은밀한 거래, 숨겨진 의도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구조 자체를 프로그래밍하는 작업입니다.
- 3단계: Narrative Context Orchestration(서사 문맥 조율)
- 템포, 전환점, 감정 곡선 같은 이야기가 흘러가는 리듬과 구조를 설계합니다. “처음 3장은 느리게 일상을 보여주고, 4장에서 사건이 터지며, 5장부터는 속도를 높여 클라이맥스로”라는 서사 설계를 하면, AI는 각 장면에서 정보 공개의 타이밍, 긴장의 완급 조절, 감정의 고저를 자연스럽게 조율합니다.
이 세 층이 잘 맞아떨어지면, AI는 단순히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가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참여자처럼 작동합니다. 컨텍스트 스토리텔링은 AI에게 인간처럼 상황을 인식하는 능력을 프로그래밍하는 문학적 기술입니다.
에이전트 시대의 프롬프트 원칙
그렇다면 AI 에이전트 시대에 창작자는 어떤 원칙을 가져야 할까요?
도구가 아니라 필요를 먼저 파악하라
도구의 기능과 엔진 업데이트에 집착하는 것보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도구와 기능을 파악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GPT-5가 나왔든 Claude 4.5가 나왔든, 최신 모델을 쫓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만들 이야기에 어떤 도구가 필요한지 아는 것입니다.
마치 목수가 톱과 망치 중 무엇을 써야 할지 아는 것처럼, 창작자는 텍스트 생성, 이미지 생성, 데이터 분석 도구 중 무엇이 지금 이 장면에 필요한지 판단해야 합니다. 기술 스펙보다 중요한 것은 상황 판단 능력입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자유도를 최대화하라
인공지능의 한계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 창조적 자유도를 최대한 부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환각(hallucination)을 제거하려 애쓰기보다, 환각이 생기는 영역과 정확성이 필요한 영역을 구분해서 설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검증된 자료를 컨텍스트로 제공하고, 인물의 내면 독백 같은 창작 부분에서는 AI에게 자유를 주는 식입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순간, AI는 단순한 타이핑 도구로 전락합니다.
나만의 에이전트를 설계하라
모든 작가의 지향점이 다르듯이, 창작을 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만의 의도를 구현할 수 있는 개인 에이전트를 설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범용 AI 도구는 평균적인 결과를 냅니다. 하지만 당신의 스타일, 당신의 세계관, 당신의 서사 리듬을 이해하는 에이전트는 오직 당신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앞으로 천 명의 작가가 있다면 천 개의 창작 에이전트가 존재하는 시대로 진입합니다. 당신의 문학적 DNA를 학습한 에이전트, 그것이 AI 시대 창작자의 진짜 무기입니다. 마치 화가가 자신만의 붓과 팔레트를 가지듯, 작가도 자신만의 AI 도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질문을 넘어 창세(創世)로
AI는 당신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존재합니다.
질문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설계하는 건축술, 그것이 컨텍스트 스토리텔링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AI에게 정답을 묻는 학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AI가 숨 쉬고,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신이 됩니다.
도구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보는 눈은 오랜 경험으로만 생깁니다. AI에게 정답을 물어보는 대신, 감각과 가치관과 의도를 설계하는 것이 진짜 인공지능 스토리텔링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계를 만들고 싶으신가요? 그 세계 안에서 AI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이제 질문하는 것을 넘어, 창조하는 것을 시작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