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그레이엄이 책을 읽고 기억나지 않아도 꾸준히 책을 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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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분명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누군가 “그 책 어땠어?”라고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당황스러운 순간 말이죠. 폴 그레이엄도 그랬고 저도 그렇습니다. 책장을 가득 채운 수백 권의 책들을 보며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남은 게 뭐지?”라는 자책감에 빠지곤 했죠.

그런데 Y Combinator 창업자 폴 그레이엄의 에세이를 읽다가, 이 불편한 질문에 대한 놀라운 답을 발견했습니다.

힐베르트가 알려준 독서의 비밀

폴 그레이엄은 12세기 프랑스 기사 빌라르두앵이 쓴 《제4차 십자군 원정 연대기》를 최소 두세 번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책에서 기억나는 내용을 전부 적어보라고 하면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울까 말까 한다고 고백합니다. 수백 권의 책이 이런 상태라면, 대체 책을 읽는 의미가 뭘까요?

그가 콘스탄스 리드의 《힐베르트 평전》을 읽다가 발견한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20세기 독일의 위대한 수학자 힐베르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문제를 완벽하게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해답의 절반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점은 폴 그레이엄이 이 통찰을 예전부터 중요하게 여겨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는 자신이 이 믿음을 어디서 얻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과거에 읽었던 여러 책과 경험이 합쳐진 결과였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이 드러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힐베르트가 이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릴 겁니다. 하지만 이 개념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은 더 깊어진 채로 남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배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후에도 말이죠.

우리의 뇌는 컴파일된 프로그램과 같습니다

독서와 경험은 세상을 이해하는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다듬어줍니다. 설령 그 경험이나 읽은 내용을 잊어버린다 해도, 그것이 여러분의 세상 모델에 남긴 영향은 그대로 지속됩니다.

폴 그레이엄은 이를 프로그래밍에 비유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마치 소스 코드를 잃어버린 채 컴파일된 프로그램과 같다는 거죠. 작동은 잘되는데, 왜 작동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가 빌라르두앵의 연대기에서 얻은 것을 찾으려면, 책에서 기억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십자군, 베네치아, 중세 문화, 공성전 등에 대한 그의 머릿속 모델을 살펴봐야 합니다. 독서의 결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보잘것없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책, 다른 시기에 읽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깨달음에는 몇 가지 구체적인 시사점이 있습니다.

독서와 경험은 보통 그것들이 일어나는 당시의 뇌 상태를 이용해 ‘처리’됩니다. 따라서 같은 책이라도 인생의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흡수됩니다. 20대에 읽은 카뮈의 《이방인》과 40대에 읽는 《이방인》은 완전히 다른 책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는 곧 중요한 책일수록 여러 번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폴 그레이엄도 예전에는 책을 다시 읽는 것에 망설임을 느꼈다고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독서를 ‘목공’ 같은 작업과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목공에서는 무언가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일을 잘못했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이제 그는 “이미 읽은 책”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미래에는 경험도 다시 체험할 수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이 시사점은 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 발전은 우리가 경험을 다시 체험하는 것을 점점 더 가능하게 만들 것입니다.

삶을 기록하고 재생하는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면, 사람들이 책을 다시 읽을 때처럼 경험을 되새기며 거기서 또 다른 배움을 얻는 것이 흔해질 수도 있습니다. 뉴럴링크 같은 기술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겠죠.

궁극적으로 우리는 경험을 재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색인을 만들고 심지어 편집할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아는지 모르는 것이 인간의 숙명처럼 보일지라도, 어쩌면 영원히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마음 편하게 책을 읽으세요

이제 여러분도 마음 편하게 책을 읽고, 때로는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모든 것들을 처리하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책장에 꽂힌 책의 내용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느냐가 아닙니다. 그 책들이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어떻게 형성했는가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한 권의 책을 펼치세요. 다 읽고 나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책은 이미 여러분의 일부가 되어 있을 테니까요.

참고 자료: Paul Graham, “How you k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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