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시장의 진짜 승부처는 기술이 아닌 신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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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AI 스타트업이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시간을 내어 미팅에 응할까요?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Microsoft에서 23년간 근무하며 Windows 부문 사장까지 오른 스티븐 시놉스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단지 여러분이 ‘.AI’로 끝나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누군가가 대화에 응한다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이 진출하려는 시장에서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은 소프트웨어 산업 60년의 역사를 통해 기업들이 어떻게 시장의 신뢰를 획득해왔는지, 그리고 그 방법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960-70년대: 커뮤니티가 곧 정당성이었던 시절

상상해보세요. 1970년대, 컴퓨터는 엄청나게 비싸고 희귀한 자원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판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죠. 사람들은 프로그램을 공유했고, 이 공유의 중심에는 SIG(Special Interest Group)가 있었습니다.

실리콘밸리, 보스턴, 그리고 올랜도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나 운영체제별로 모인 이 그룹들은 일종의 초기 GitHub 커뮤니티였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시놉스키는 올랜도의 항공우주 산업 종사자들과 함께 SIG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은퇴한 장군들이 로켓 발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어요. 정말 멋졌죠.

이 시대의 정당성은 RFC(Request For Comment)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새로운 표준을 제안하려면 제대로 포맷된 문서를 작성해야 했고, 오직 적절한 SIG 내에서 인정받은 사람만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자격을 가졌습니다. 네트워킹 관련이라면 Bob Metcalf의 승인이 필요했던 것처럼요.

홈브루 컴퓨터 클럽과 빌 게이츠의 도전

SIG는 곧 더 반항적이고 클럽 같은 형태의 User Group으로 진화했습니다. 여기서는 실제 소프트웨어 배포가 이루어졌죠. 사람들은 플로피 디스크를 들고 모임에 참석해 직접 프로그램을 복사했고, 특정 그룹에서 배포한 버전이 “정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바로 이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뉴스레터에 빌 게이츠는 역사적인 공개 서한을 실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소프트웨어를 훔치고 있습니다. 돈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프트웨어 회사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 편지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 커뮤니티가 얼마나 중요한 정당성의 원천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Microsoft의 정당성 확보 전략: 직접 대화하라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뉴스레터에 긴 기술 문서를 기고했습니다. “운영 체제란 무엇인가?”, “마우스와 GUI란?” 같은 주제로 말이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양방향 대화였습니다.

대부분의 교류는 Q&A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Microsoft는 이를 통해 얻은 고객 피드백을 제품 개발에 직접 반영했습니다. Windows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도 Microsoft에 자신의 작업을 알리며 상호 정당성을 구축했죠.

시놉스키가 1993년 Windows용 C++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출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질문이 쏟아졌어요. 그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이 곧 Windows의 신뢰도를 결정했습니다.

1980-90년대: 잡지사가 킹메이커가 되다

1981년 PC Magazine의 창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이제는 프로그래밍 언어뿐만 아니라 워드 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데이터베이스 등 PC 소비자 경험 전체가 평가 대상이 되었습니다.

뉴햄프셔 순례: Byte Magazine의 성지

C++ 컴파일러를 출시한다고 가정해봅시다. Microsoft 팀은 보스턴으로 날아가 차를 렌트해 뉴햄프셔로 향했습니다. 목적지는 Byte Magazine이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죠. 원래는 소 수의사용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양쪽으로 열리는 거대한 구조였습니다.

그 건물의 한 층 전체에는 모든 종류의 마이크로컴퓨터와 프린터가 갖춰져 있었고, 수십 명의 평가자들이 소프트웨어를 철저히 테스트했습니다. 경쟁사 제품들과 비교하며 세밀한 평가를 진행했죠.

아카데미 시상식을 연상시키는 Editor’s Choice

PC Magazine Editor’s Choice를 수상하는 것은 마치 아카데미 시상식과 같았습니다. 라스베이거스 Comdex에서 열린 시저스 팰리스의 블랙타이 만찬에 초대되어 트로피를 받았고, Microsoft는 이런 트로피들을 전시하는 케이스까지 보유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수상 후 소프트웨어 박스 표지에 “PC Magazine Editor’s Choice” 라벨을 붙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곧 시장에서의 정당성 증명서였던 거죠.

신문 시대: Walt Mossberg라는 이름의 게이트키퍼

시간이 흐르면서 정당성의 중심은 신문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Walt Mossberg가 있었습니다.

Wall Street Journal의 Mossberg는 전쟁과 세계은행을 취재하던 베테랑 기자였습니다. 그가 컴퓨터 칼럼을 시작했을 때, 그의 역할은 단순한 리뷰어가 아니라 제품 제조사에게 책임을 묻는 감시자였습니다.

iPhone 출시와 인쇄 매체의 정점

2007년 iPhone 출시는 인쇄 매체 영향력의 정점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Wall Street Journal 독자 대부분은 Blackberry를 사용했습니다. 진지한 비즈니스맨이라면 당연히 Blackberry를 쓰는 시대였죠.

그런데 갑자기 터치스크린에 웹 브라우저와 음악 플레이어 기능을 가진 이상한 기기가 등장했습니다. Walt는 몇 주간 이 기기를 테스트하며 궁금한 점이 있으면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스티브 잡스 본인이었습니다. 그만큼 핵심 저널리스트와의 관계가 제품의 성패를 좌우했던 것입니다.

Outlook 97의 악몽

시놉스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리뷰가 하나 있습니다. Outlook 97의 첫 버전을 출시했을 때, Walt는 그것을 “Byzantine(복잡하고 난해한)”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말을 떠올리면 속이 메스꺼워집니다.

New York Times는 전체 릴리스를 “Leviathan(거대하고 통제 불능)”이라 불렀고, 다음날 그는 전 세계에서 온 CIO들에게 “Leviathan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냉장고 회사인데요”라고 말하는 임원들 앞에서 말이죠.

영향력 있는 최종 사용자: PC에서 ChatGPT까지

오늘날 대기업 내 AI 도입 패턴은 1980년대 PC 도입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1982년 올랜도 국방 계약업체의 풍경

1982년 여름, 올랜도의 거대 국방 계약업체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시놉스키는 PC를 카트에 실어 사무실로 가져왔습니다. 당시는 네트워크가 없었고,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죠.

곧 좁은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Lotus 1-2-3과 WordPerfect 사용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한 장군 출신의 고위 임원이 PC를 요청했고, 시놉스키는 직접 그의 사무실까지 PC를 밀고 가서 설치해줬습니다.

이러한 초기 사용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업무에 대해 창의적으로 접근하려는 의지를 가진 소수였다는 점입니다.

ChatGPT의 확산 메커니즘

ChatGPT의 초기 사용자들도 정확히 같은 특성을 보입니다. 대기업 내에서 호기심 많고 업무 개선에 관심 있는 소수가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용을 시작합니다. 브라우저 탭을 하나 열면 되니까요.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저것 좀 봐, 저 사람이 방금 뭘 한 거지!” 이렇게 기술은 자연스럽게 확산됩니다.

IT 부서의 부상: 제품이 아니라 비전을 팔아라

Windows 95 출시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일반인들이 가정에서 PC를 구매하기 시작하자, IT 부서는 더 이상 직원들의 개인 신용카드로 구매한 PC 비용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IT 부서는 백오피스에서 프론트오피스로 이동했고, 영향력 있는 파워 유저뿐 아니라 마케팅과 영업 직원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까지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Executive Briefing Center의 충격

이 시점부터 판매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제품 정당성만으로는 부족했고, 미래에 대한 스토리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Microsoft는 Executive Briefing Center에서 CIO들을 하루 종일 호스팅했습니다. 시놉스키는 자신의 첫 미팅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Office 97의 멋진 데모를 준비했어요. ‘이게 Office 97이고, 정말 훌륭합니다’라고 말할 준비를 했죠. 그런데 그들이 듣고 싶어 한 건 오직 제 10년 계획뿐이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은 평가를 받았고, 시놉스키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습니다. 엔터프라이즈 영업팀을 이끌던 Steve Ballmer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제품 출시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교훈이었습니다. 개발에 쏟은 엄청난 노력, 데모, 기능 구현의 순간만 생각했지만, 고객들은 “10년 후 워드 프로세싱은 어떤 모습일까?”만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대기업 vs 스타트업: 정당성의 비대칭

비즈니스 세계에서 정당성은 미래 예측의 신뢰성에서 나옵니다. 일단 영향력과 정당성을 확보하면, 고객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Microsoft의 비전을 구매했다고 해서 해고당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스타트업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떤 스타트업의 비전에 투자했는데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 구매 담당자는 다시는 스타트업에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 끝입니다.

반면 Microsoft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러분 회사의 CEO가 Sun Valley 같은 행사에서 Satya를 만나 “우리 직원들이 Microsoft에 대해 불평하더라고요”라고 말하는 정도로 끝납니다. 다른 정당한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정당성 신호

현재 AI 스타트업이라면 누군가는 여러분과 대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출하려는 분야에서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의료나 법률 같은 분야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규칙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의 AI 기술만으로는 의사나 병원 관리자가 시간을 내어 소프트웨어 논의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당성을 찾기 위해 노력할 뿐,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도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정당성의 형태

개발자와 엔지니어에게는 GitHub의 활동 기록이 강력한 도구입니다. 소비자 시장에는 Product Hunt 같은 신호가 있죠.

하지만 기업 대상 판매를 하는 회사들에게는 Andreessen Horowitz 같은 벤처캐피털이 제공하는 executive briefing center를 통한 소개가 큰 도움이 됩니다. 이는 여러분이 자격을 인증받았다는 의미니까요.

그리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술 세계에서 얼마나 상향식 인증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GitHub 스타가 수천 개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작은 회사 = 리스크”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정당성은 여전히 모든 것의 중심이다

트렌드는 왔다 갑니다. Walt Mossberg 같은 킹메이커도 왔다 갑니다. 하지만 정당성 신호는 구매 결정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으로 남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선택지가 많을수록 정당성 신호를 더 많이 찾아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1960년대 SIG 모임에서부터 오늘날 AI 스타트업 시장까지 일관된 패턴입니다.

여러분의 제품이 훌륭한가요?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장은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 “당신은 믿을 만한가요?”
  • “당신의 비전은 10년 후에도 유효할까요?”
  • “당신에게 투자하는 것이 안전한 선택일까요?”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은 시장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참고 자료: a16z, “How to be Legiti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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