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러분은 카페에서 메뉴를 볼 때 가장 비싼 음료의 가격을 먼저 확인하고, 그보다 저렴한 다른 옵션을 선택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부동산을 알아볼 때 처음 본 매물의 가격이 이후 모든 집값 판단에 영향을 미쳤던 적은 없으신가요? 이런 현상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앵커링 효과라는 인간 심리의 강력한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펠탑 계단 수로 본 앵커링의 실체
상상해 보세요. 누군가 여러분에게 “에펠탑 꼭대기까지의 계단 수가 250개보다 많은지 적은지”를 먼저 묻고, 그다음에 실제 계단 수를 추정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떨까요? 흥미롭게도, 만약 처음 질문에서 250이 아닌 5,000이라는 숫자를 제시했다면, 여러분의 추정치는 분명히 더 높게 나올 것입니다.
실제로 에펠탑의 계단 수는 1,710개입니다. 하지만 이 정답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 제시된 임의의 숫자가 우리의 판단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판단과 의사결정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연구되는 앵커링 효과의 핵심입니다.
전화번호가 집값을 결정한다는 충격적 실험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앵커링 효과가 얼마나 무작위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한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 마지막 세 자리를 1,000배 한 값을 적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화번호가 678로 끝난다면 678,000이라는 숫자를 적는 것이죠.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이 이후 지역 주택 가격을 추정할 때, 이 완전히 무작위적인 숫자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연구진이 주택 시장에 관한 정확한 사실과 수치를 10분 동안 상세히 설명한 후에도, 이러한 무의미한 앵커가 여전히 판단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합리적 사고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전화번호라는 개인적이고 임의적인 숫자가 부동산이라는 중요한 경제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니,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이 얼마나 취약한지 깨닫게 됩니다.
48주간 지속되는 앵커의 마법
그렇다면 이런 앵커링 효과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런 영향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연구팀이 앵커링 효과의 지속성을 조사한 실험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참가자들에게 0부터 99까지의 숫자가 적힌 카드 한 장을 뽑게 했습니다. 이 숫자가 앵커 역할을 했죠. 그 후 참가자들은 블루투스 키보드나 미술 서적 같은 다양한 상품에 대해 얼마나 지불할 의향이 있는지 답했습니다.
놀랍게도 결과는 앵커링 효과가 48주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일주일 후에는 효과가 다소 감소했지만, 여전히 통계적으로 유의미했고, 무려 1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8주 후에도 카드에 적힌 숫자가 1 증가할 때마다 평균적으로 지불 의향이 14센트씩 증가했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척도 왜곡을 넘어선 판단의 오염
이 연구는 앵커링 효과가 단순히 사람들이 가치 판단에 적용하는 척도를 일시적으로 왜곡하는 것 이상임을 시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더 크게 생각하게 하거나 더 작게 생각하게 하는” 정도의 영향이 아닙니다.
앵커는 우리의 판단 시스템에 오염을 일으킵니다. 마치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해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한 번 노출된 앵커는 오래도록 남아 있으며 쉽게 수정되지 않는 흔적을 남깁니다. 이는 의사결정자가 빠지기 쉬운 가장 끈적하고 지속적인 함정 중 하나입니다.
조작의 도구로 활용되는 앵커링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앵커링 효과가 타인이 우리의 결정을 조작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리한 판매자들은 이미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딜러가 처음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한 후 “특별 할인”을 제공하는 것, 부동산 중개업자가 예산보다 훨씬 비싼 집을 먼저 보여주는 것, 온라인 쇼핑몰에서 “정가” 옆에 “할인가”를 표시하는 것 등이 모두 앵커링 효과를 활용한 전략입니다.
심지어 협상 상황에서도 첫 번째 제안이 최종 합의에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연봉 협상에서 구직자가 먼저 높은 금액을 제시하면 최종 연봉이 더 높아지고, 반대로 채용 담당자가 먼저 낮은 금액을 제시하면 최종 연봉이 더 낮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앵커링 효과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앵커링 효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전략을 통해 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식적인 인식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혹시 내가 어떤 숫자나 정보에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둘째,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보세요. 하나의 기준점에만 의존하지 말고,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분석해보는 것이 도움됩니다.
셋째, 시간을 두고 재검토하세요. 즉흥적인 판단보다는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앵커의 영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넷째, 반대 관점을 의도적으로 고려해보세요. “만약 이 숫자가 반대였다면 어떻게 판단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앵커들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 앵커링 효과는 더욱 교묘하고 광범위하게 작용합니다. 소셜미디어의 ‘좋아요’ 수, 온라인 리뷰의 별점, 검색 결과의 순서, 심지어 뉴스 헤드라인의 숫자까지도 우리의 판단에 미묘한 앵커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제품이라도 “5점 만점에 4.2점”이라는 평점을 먼저 본 후에는 그 제품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지고, “100점 만점에 84점”이라는 평점을 본 후에는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낮아질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와 투자에서의 앵커링 함정
투자나 비즈니스 영역에서 앵커링 효과는 특히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주식의 52주 최고가나 최저가, 부동산의 호가, 기업 가치평가의 첫 번째 수치 등이 모두 강력한 앵커로 작용합니다.
많은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수할 때 그 주식의 과거 최고가를 기준으로 “지금이 저점이다”라고 판단하거나, 반대로 최저가를 기준으로 “아직 더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앵커링 효과의 한 예입니다.
성공적인 투자자와 사업가들은 이런 앵커링 함정을 인식하고,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 분석에 더 많이 의존하려고 노력합니다. 워런 버핏이나 찰리 멍거 같은 투자 대가들이 항상 “내재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앵커링 효과는 우리의 일상과 중요한 의사결정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이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더 나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다음 중요한 결정에서는 어떤 앵커가 작용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 자료: Alain Samson Ph.D., “Data Hazard: Irrelevant Information Contaminates Judgment”